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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 “실패하면 ‘우향우’ 해서 바다에 몸 던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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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 2014-08-04 10:5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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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EOin 커버스토리 창업주에서 찿는 창경제시리즈 두 번째 지난 7월 3일 포스코 창립회원들이 국립현충원의 박정희 전 대통령과 박태준 전 포스코 창립회장 묘소 앞에 모여 추모기념행사를 가졌다. 이날은 지금으로부터 40년 전 포철 용광로에서 사상 첫 쇳물을 생산한 날이었다. 포항종합제철(현 포스코) 창설요원 가운데 현재 생존해 있는 유공인은 총 16명, 이들은 ‘포스코 창립회’를 설립하고 생전 박태준 사장의 뜻깊은 업적을 기렸다. 국가와 민족을 위해 땀 흘려 일한 그가 남긴 일대기는 젊은 피가 끓고 있는 이 시대 청년들에게 커다란 감동을 안기고 있다. 창업주 시리즈 두 번째 이야기의 주인공, 바로 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이다.


CEOin 커버스토리

창업주에서 찿는 창경제시리즈 두 번째 - 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

“실패하면 ‘우향우’ 해서 바다에 몸 던지라”

故 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


최고 경영자로서 제철보국(製鐵保國)의 기업이념

책임정신과 완벽주의, 철저한 투명경영, 인간존중의 경영이념을 실천적으로 보여줘...

ceoinissue@ceoinnews.com



無에서 有 일궈낸 ‘철강왕’ 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

한국경제 초석 다진 위기극복의 달인


지난 7월 3일 포스코 창립회원들이 국립현충원의 박정희 전 대통령과 박태준 전 포스코 창립회장 묘소 앞에 모여 추모기념행사를 가졌다. 이날은 지금으로부터 40년 전 포철 용광로에서 사상 첫 쇳물을 생산한 날이었다. 포항종합제철(현 포스코) 창설요원 가운데 현재 생존해 있는 유공인은 총 16명, 이들은 ‘포스코 창립회’를 설립하고 생전 박태준 사장의 뜻깊은 업적을 기렸다.

국가와 민족을 위해 땀 흘려 일한 그가 남긴 일대기는 젊은 피가 끓고 있는 이 시대 청년들에게 커다란 감동을 안기고 있다. 창업주 시리즈 두 번째 이야기의 주인공, 바로 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이다.











무산될뻔한 제철소 건설을 이루다

박태준 회장의 제철소 건설 이야기는 지금까지 회자되고 있다. 어려운 시대를 탓하지 않고 제철소 건설의 선두주자로 나선 박태준 회장의 강한 의지는 애국심에서 비롯됐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경남 양산 출신인 박태준 회장은 1927년 9월 태어나 6세 때 일본으로 건너갔다. 이후 1945년 일본 와세다대학 기계학과에 입학했으며 광복을 맞자 학업을 중단하고 바로 귀국했다. 고국에 대한 열정이 가득했던 그는 1948년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육군 소위로 임관한 뒤 6·25전쟁에 참전했다. 1964년 지금의 대구텍인 대한중석 사장을 지낸 박태준 회장은 1968년 포항종합제철(지금의 포스코)을 창립했다.

포항제철소가 건설되기 이전 국내 철강산업은 거의 황무지나 다름없었다. 1958년 이후 정부의 다섯 차례에 걸친 제철소 건설 시도는 모두 실패로 끝나고 1961년 박정희 대통령이 취임하면서 종합제철 건설 계획이 보다 구체화됐다. 박정희 대통령은 종합제철소의 건설을 박태준 당시 대한중석 사장에게 맡겼다. 만년 적자였던 대한중석을 1년 만에 흑자체제로 정착시킨 박태준 사장의 경영능력과 리더십을 높이 평가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제아무리 박태준 회장이라도 자금 문제에 있어서는 고민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1966년 제철소의 자금마련을 위해 5개국 8개사가 참여하는 대한국제제철차관단(KISA: Korea International Steel Associates)이 정식으로 발족됐다. KISA와의 기본협정에 따르면 1972년까지는 제철소가 완공돼야 했고 늦어도 1969년 초부터는 건설공사를 시작해야 했다. 하지만 KISA로부터 차관도입을 손꼽아 기다리던 중 IBRD(세계은행), USAID(미국국제개발처), IECOK(대한국제경제협의체) 등 곳곳에서 ‘한국의 종합제철사업은 시기상조’라는 의견이 대두됐다. 국내언론과 농촌 출신 국회의원을 중심으로 국내 여론도 반대수위가 높았다.

고민을 거듭하던 박태준 회장은 차관 교섭차 미국을 방문하고 돌아오는 길에 하와이에서 대일청구권의 일부를 종합제철건설자금으로 전용하는 소위 ‘하와이구상’이라는 반짝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일제 식민통치에 대한 일종의 배상금이었던 청구권 자금 3억 달러는 1966년부터 1975년까지 10년 동안 균등분할로 무상지급하도록 돼 있었다. 문제는 그 자금을 농림수산부문에 투자하기로 양 정부간 합의가 끝났다는 것이다.

박태준 회장은 그 길로 곧장 일본으로 향했다. 당초 농림수산업에만 쓰기로 일본과 합의했던 자금을 제철소 건설에 쓰려면 일본 내각의 만장일치 동의를 구해야 했기 때문이다. 무조건 발로 뛰며 일본 주요 정재계 관계자들을 만나고 설득했다.

나카소네 전 일본 총리는 당시 상황에 대해 “박 선생은 보는 이들이 오히려 안타까워할 정도로 열심히 뛰어다녔다. 그의 진지한 노력에 일본은 감동했다”고 회고록에 썼을 정도다.

박태준 회장은 결국 청구권자금 7370만 달러와 일본 은행차관 5000만 달러를 합한 1억 2370만 달러를 얻어내는데 성공했고, 1969년 8월 제3차 한일각료회담에서 일본정부가 종합제철 건설 사업을 지원키로 함으로써 본격적으로 제철소건설이 시작됐다. 그리고 1973년 6월 9일 국내 최초의 용광로를 준공해 첫 쇳물을 생산하는 감격의 순간을 얻을 수 있었다.

“실패하면 ‘우향우’ 해서 바다에 몸 던지라”

박태준 회장은 최고 경영자로서 제철보국(製鐵保國)의 기업이념과 소명의식, 책임정신과 완벽주의, 철저한 투명경영, 인간존중의 경영이념을 실천적으로 보였다. 특유의 카리스마로 직원들이 제철소 건설을 포기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남다른 채찍질도 가했다. 바닷바람에 모래가 날려 눈도 뜰 수 없는 공사현장을 둘러 본 박정희 대통령이 ‘남의 집 다 헐어 놓고 과연 제철소가 되기는 되는 건가’라고 근심했다고 전해진다. 이렇게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박태준 회장은 임직원들에게 선조들의 피와 땀으로 지어지는 제철소 건설이 실패할 경우 ‘우향우’하여 동해 바다에 몸을 던져 죽을 각오도 불사하라는 말을 하며 독려했다.

특히 박태준 회장은 1970년 가장 먼저 착공한 열연공장 건설이 지연되자 열연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행정·사무직을 포함한 모든 임직원을 공사현장에 투입시켜 공기를 성공적으로 만

 

박태준 회장의 리더십은 본질이 다르다. 그의 리더십은 수년간 책을 읽으며 쌓은 학습(學習)에 있었다.

공부를 필생의 업으로 여긴 박태준 회장은 책을 읽고 고민하고 끊임없이 학습했다. 많은 의견을 듣고 확신이 서면 과감하게 결단을 내렸다


회했다. 결국 박태준 회장은 다른 회사들이 통상 4~5년 만에 건설하던 제철소를 3년 만에 건설할 수 있었다.

언뜻 보면 무자비한 공사 현장이다. 건설의 건(建)자도 모르는 사무직원까지 공사에 투입하면서까지 무리를 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이러한 박태준 회장의 결단은 결코 극단적이거나 즉흥적인 것이 아니었다.

일각에서는 박태준 회장을 ‘돌관작업(突貫作業) 스타일’이라고 평가하기도 한다. 공정을 맞추기 위해 몰아치기 공사를 한다는 일종의 비아냥이다. 하지만 박태준 회장의 리더십은 본질이 다르다. 그의 리더십은 수년간 책을 읽으며 쌓은 학습(學習)에 있었다.

공부를 필생의 업으로 여긴 박태준 회장은 책을 읽고 고민하고 끊임없이 학습했다. 많은 의견을 듣고 확신이 서면 과감하게 결단을 내렸다. 이러한 습관은 포스코 연수시스템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포스코인재개발원은 무(無)에서 유(有)를 만들어낸 전초기지로 포스코만큼 직원들의 해외연수를 많이 보낸 기업도 드물다.

박태준 회장은 회사를 경영하면서 비효율과 부실의 여지를 막기 위해 조직의 자율과 책임문화 정립에 중점을 뒀다. 이러한 책임의식은 자연스럽게 완벽주의로 연결됐다. 그는 부실공사, 대충대충, 무사안일, 안전불감, 준비부족 등을 심하게 질타했다. 그는 항상 ‘최소의 비용으로 최고 품질의 제품’을 만드는 것이 포스코의 사명이라는 인식을 갖고 있었다.

1977년 3기 설비가 공기지연으로 고전하고 있을 때에도 발전 송풍 설비 구조물 공사가 80% 정도 진행된 상태였지만 부실공사를 절대 허용하지 않겠다며 모두 폭파한 일은 완벽주의의 의지를 보여준 대표적인 사례다.

그는 이 부실에 대해 강력히 경고하고 완벽주의에 대한 경각심을 드높일 수 있는 기회라고 판단했다. 박태준 회장은 거창하게 ‘폭파식’을 거행하면서 그 자리에 현장책임자는 물론 외국의 기술감독자와 포항제철 임직원들이 모두 참석하도록 했다. 직원들의 머릿속에 박태준 회장의 완벽주의가 뚜렷하게 각인되는 순간이었을 것이다.

박태준 회장은 무사안일로부터 이어지는 부실공사를 경멸했다. 그가 광양제철소를 건설할 당시 잠수부를 동원해 물속의 구조물까지 일일이 점검했으며 나사, 기둥, 못 하나 허술하면 불호령이 떨어졌다.

요즘 국내 청년 사업가들은 박태준 회장의 일대기를 지침 삼아 창조적 경영을 이룩하려는 노력을 하고 있다. 한 기업을 세우기까지 그가 겪었던 온갖 시련들, 그리고 위기를 박태준 회장만의 기지로 극복했던 일화들은 현대를 살아가는 젊은이들에게 커다란 힘이 되고 있다.


젊은 과학인재들에 희망과 격려 전달

박태준 회장의 남다른 원칙과 신념은 곧 결실을 맺었다. 박태준 회장의 지휘 하에 포스코는 마침내 광양 4기까지 종합 준공해 냄으로써 세계 굴지의 철강회사로 우뚝 섰다. 카네기가 20세기 초 연산 1,000만톤 규모로 철강왕에 올랐다면 박태준 회장은 20여년 만에 2,100만톤의 철강회사를 만든 새로운 철강왕으로 오늘날 한국경제의 초석을 다지게 된 것이다.

제철소 건립은 성패에 따라 대한민국의 경제가 좌지우지되는 제2의 전쟁이나 마찬가지였다. 박태준 회장은 국가를 위한 신념과 일관된 원칙을 고수하면서 인간의 한계를 넘어섰다. 박태준 회장은 1987년 철강업계의 노벨상이라는 베세머 금상을 수상했다. 현역 기업인으로서는 세계 최초로, 미국 앤드루 카네기도 은퇴한 뒤인 1904년에 이 상을 수상했다. 이와 함께 이듬해인 1988년 미국 카네기멜런대에서 명예 공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끊임없는 공부와 연구개발을 중요하게 여기는 박태준 회장으로서는 명예로운 결과물이었다.

그는 제철소 건설 후에도 꾸준한 연구개발의 중요성을 인식해 1986년 포항공대(포스텍)를, 이듬해에는 포항산업과학연구원(RIST)을 설립함으로써 포스코-포항공대-포항산업과학연구원을 세 개의 축으로 하는 산학연 연구개발 체제를 구축했다. 이는 국내 최초의 산학연 연구개발 체제로, 산업계 전반에 걸쳐 새로운 기술개발 모델을 제시했고 현재의 포스코가 전세계 철강업계의 기술 리더십을 확보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됐다.

박태준 회장은 이에 그치지 않고 과학자들의 양성에도 힘을 쏟았다. 그가 청암재단 이사장으로 재직할 당시 2009년 7월 국내에서 기초과학을 연구하는 젊은 과학인재들에게 기회를 제공하기도 했다. 그는 국내 대학과 연구소에서 수학, 물리학, 화학, 생명과학을 연구하는 박사과정·박사후연구원(Post-doc)·신진교수 등을 매년 30명 정도 선발, 지원하는 ‘청암 베세머 과학펠로’ 선발을 진행하기도 했다. 당시 박태준 회장은 “베세머라는 이름을 붙인 이유는 분명하다”며 “해외유학 대신 국내에서 연구하는 우리의 젊은 과학자가 자기 분야에서 세계 최고가 돼야 한다는 희망과 격려를 담고 있다”고 강조했다.

옳다고 여기는 것은 그대로 실천에 옮기는 주의였던 박태준 회장은 청렴함에 있어서도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그는 포스코 주식을 단 한주도 갖지 않았다. 포스코가 제철설비를 많이 팔아준 답례로 미쓰비시 그룹이 거양해운이라는 회사를 설립해 박태준 회장에게 선물했다. 그러나 박태준 회장은 수익금 전액을 포항공대 장학금으로 쓰도록 했다. 이 뿐만 아니라 자택마저 매각해 청년의 미래를 위해 기부했다. 세상을 떠나는 날까지 본인 명의의 재산이 거의 없을 정도로 재산 욕심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시대가 시대인 만큼 박태준 회장은 포스코를 정치적 압력으로부터 지키기 위해 1980년 정치에 입문했다. 그는 불안한 정국 속에서 대통령의 부름에 응했다. 그는 4선 국회의원에 집권여당인 민정당 대표(1990년), 자민련 총재(1997년), 32대 국무총리(2000년)까지 올랐으나 정치인생에 있어서는 환멸을 느낄 정도로 수난을 겪었다.

결국 1993년 정치적 보복으로 포항제철 명예회장직이 박탈되는 일까지 생겼다. 또 뇌물수수 혐의로 일본으로 망명했고 국무총리 재임 때 조세 회피 의혹으로 불명예 퇴진을 한 일도 있었다. 세상은 박태준 회장의 일관적인 성공을 가만 놔두지 않았던 모양이다.

박태준 회장은 이에 그치지 않고 과학자들의 양성에도 힘을 쏟았다. 그가 청암재단 이사장으로 재직할 당시 2009년 7월 국내에서 기초과학을 연구하는 젊은 과학인재들에게 기회를 제공하기도 했다. 그는 국내 대학과 연구소에서 수학, 물리학, 화학, 생명과학을 연구하는 박사과정·박사후연구원(Post-doc)·신진교수 등을 매년 30명 정도 선발, 지원하는 ‘청암 베세머 과학펠로’ 선발을 진행하기도 했다. 당시 박태준 회장은 “베세머라는 이름을 붙인 이유는 분명하다”며 “해외유학 대신 국내에서 연구하는 우리의 젊은 과학자가 자기 분야에서 세계 최고가 돼야 한다는 희망과 격려를 담고 있다”고 강조했다.


박태준 회장의 3대 철학 ‘공익·원칙·사람’

1986년 4월 박태준 회장이 한국의 일관제철소 건설에 부정적인 보고서를 냈던 자페를 초청해 “지금도 당신의 그 보고서가 옳다고 믿느냐”고 질문하자 자페는 “현재도 그 보고서가 옳지만 박태준 회장이 상식을 초월하는(Beyond common sense) 일을 하여 보고서를 틀리게 했다”고 답변했다. 1978년 중국의 최고 실력자 등소평은 일본의 기미츠제철소를 방문한 자리에서 이나야마 요시히로(稻山嘉寬) 당시 신일철 회장에게 “중국에도 포항제철과 같은 제철소를 지어달라”고 했다가 “중국에는 박태준이 없지 않느냐”라는 대답을 듣고 한동안 중국에서 박태준 연구 열풍이 불기도 했다. 박태준 회장은 포스코 역사 40년 중에서 26년을 최고 경영자로 일했다. ‘짧은 인생을 영원한 조국에’라는 좌우명을 평생 지킨 것이다.

박태준 회장의 경영 철학은 크게 공익 추구, 기본 원칙, 사람 등 3가지 원칙으로 축약된다. 포스코는 단순히 이익을 추구하는 회사가 아닌 국가를 가난으로부터 해방시켜야 한다는 대의명분을 갖고 있었다. 박태준 회장의 ‘제철보국’의 신념은 공익 추구의 구체적인 표현이며 이는 전 구성원의 합의를 이끌었다. 직원들이 열심히 일할 수 있도록 하는 동기부여가 된 것은 말할 것도 없다.

포항제철은 출발부터 많은 사람들의 인사청탁과 납품 청탁이 있었으나 단호하게 잘랐다. 청탁이 들어온 사람은 즉시 채용 명단에서 제외시킬 정도였다. 송풍설비의 콘크리트 구조물이 80% 이뤄진 상태에서 폭파작업을 한 것은 박태준 회장의 강한 원칙을 전 세계에 보인 성과물이었다.

박태준 회장은 좋은 인재들이 열심히 일하도록 하기 위해서는 좋은 환경이 뒷받침 돼야 한다고 생각했다. 자본금이 부족한 상황에서도 사원주택부터 지었고 인재 육성을 우선시했으며 공장도 지어지지 않은 어려운 상황에서도 직원들의 해외연수를 아까워하지 않았다.

요즘 국내 청년 사업가들은 박태준 회장의 일대기를 지침 삼아 창조적 경영을 이룩하려는 노력을 하고 있다. 한 기업을 세우기까지 그가 겪었던 온갖 시련들, 그리고 위기를 박태준 회장만의 기지로 극복했던 일화들은 현대를 살아가는 젊은이들에게 커다란 힘이 되고 있다.

*박태준 회장 어록

그가 제시한 포스코의 사시(社是)인 '제철보국'(製鐵報國)은 아직도 포스코 임직원들의 가슴 속에 깊이 남아 있다. 산업의 쌀인 철을 충분히 만들어 나라에 보답하겠다는의지이다. 그의 어록을 소개한다.△철은 산업의 쌀이다. 싸고 좋은 품질의 철을 충분히 만들어 나라를 부강하게 하는 것. 이것이 곧 제철보국이다.△사람은 미치광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가 아니면 아무것도 이룰수 없다.△나는 많은 시간을 사람 문제에 골몰한다. 기업은 사람이 하는 것이고, 사람만이 창의력을 발휘할 수 있다.△이 돈은 우리 조상님들의 핏값이다. 공사를 성공하지 못하면 우리 모두 다 우향우해서 저 포항 앞 바다에 빠져 죽자. (대일청구권 자금으로 포항제철 건설에 나서면서) △무엇인가를 이루려면 10년은 걸린다. 몇날 밤이고 진지하게 10년 후의 청사진을 그려보라. 인생은 집을 짓는 것과 같아서 청사진이 나와야 주춧돌을 놓을 수 있다.△이 땅에서 태어난 것 그 자체가 큰 인연이다. 나에게 일관제철소를 만드는 일이 주어졌을 때 나는 회피할 수 없는 사명감을 느꼈으며 경건한 마음으로 사업을 시작했다.△각하, 불초 박태준, 각하의 명을 받은 지 25년 만에 포항제철 건설의 대역사를 성공적으로 완수하고 삼가 각하의 영전에 보고 드립니다. (1992년 10월 3일 서울 동작동 국립현충원 내 고 박정희 대통령 무덤 앞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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