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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수 음악감독, 오선지 너머 보이지않는 세상의 소리를 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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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 2025-04-20 21:30:22
  • 수정 2025-04-23 09:2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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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수 음악감독, 

오선지 너머 보이지않는 세상의 소리를 담다

 음악, 말보다 더 깊은 언어


 4월의 봄날, 김성수 음악감독은 자신이 머무는 작업실 1층에서 만났다. 오선지 위에 음표 하나를 더하지 못한 채였다. “지금 곡이 안 나와요”. 이럴 땐 멈춰야 해요.” 그렇게 그는 인터뷰 장소로 향했다.                

이야기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감기로 인해 살짝 코가 막힌 목소리였지만, 마감의 압박을 농담처럼 흘려보낸다. “지금 독촉 전화 올 타이밍이에요. 그 전에 인터뷰 마무리해야죠.”                                                    그렇게 웃으며 말을 잇던 김성수 감독

 “저는 배운적 없습니다 하하하.”                                                                                                                           김성수 음악감독은 이 말을 툭 던졌다. 

웃음기 섞인 말투였지만, 그가 살아온 길을 들여다보면 단순한 농담은 아니다. 사수가 없었다. 배운 적도, 맡겨준 사람도 없었다. 기타 한 대와 카세트테이프 몇 개. 그것이 소년 김성수의 음악학교였다.

 그리고 그는 그 결핍을 무기로 삼아, 스스로의 언어를 음악으로 만들어냈다. 비선형적인 사운드, 정돈되지 않은 정서의 조각들, 설명 없는 감응. 그것이 그의 세계다.     ©김성수 음악감독 인터뷰 1부--편집자 주


 

유년 시절, 

결핍에서 태어난 감각의 창고

 김성수 스타일의 서막

 “저, 되게 가난했어요. 

하고 싶은 게 많았는데 할 수 있는 건 없었죠.”김성수 감독의 어린 시절은 ‘결핍’이라 말할 수 있다. 하지만 그 결핍은 상상력의 창고가 되었다. “책밖에 없었어요. 삼국지 수십 번씩 봤죠. 고우영 삼국지는 지금도 외워요.”그는 책들 속에서 상상의 오케스트라를 지휘했다. 고우영의 『삼국지』, 『셜록 홈즈』, 『초한지』, 『열국지』… 이야기 속 세계를 탐험하며 그는 서사의 구조와 감정의 운율을 몸으로 익혔다.                    당시 그가 할 수 있었던 유일한 창작은 녹음기였다. 친구들을 모아 라디오 드라마를 녹음했고, ‘관우는 누구, 장비는 누구’ 역할을 나눠 테이프에 목소리를 담았다. 그에게는 그게 음악보다 먼저 시작한 ‘소리로 세계를 만드는’ 훈련이었다.  

결정적 계기는 레드 제플린의 ‘Stairway to Heaven’. 초등학교 5학년, 친구의 형이 들려준 이 곡은 그를 전율시켰다. 

그날 이후로 음악이 그를 놔주질 않았다.사진 1989년 김성수 감독

“음악 교육요? 그런 건 없었어요. 피아노 배우겠다고 했다가 혼났죠.”

하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아버지를 설득해 어렵게 손에 넣은 혼도(Hondo)사의 일렉기타 한 대. “12만 원짜리였어요. 지금도 기억나요.” 일본에서 수입된 악보집을 번역도 못 한 채 보며 따라했다. 

“귀로 듣고, 손으로 외우는 방식, 음악도 저는 제 방식대로 하니까 남들보다 조금 더 빨리 익히는 방식들이 있더라구요. 

왜냐하면 기초부터 시작을 못 했으니까 그 빈틈을 메꿀 수 있는 방법들이 필요해서 배우는 거니까 빠른 거예요.”   

그는 부산 광복동의 일본 서적 코너에서 악보를 뒤적이고, 밤마다 테이프를 돌리며 연주를 베꼈다

 그렇게 시작된 음악은 스스로 만든 ‘그만의 문법’이 되었다. 

  “나는 기타리스트가 아니었더라고요”

 미국으로 간 청춘, 그 끝에서 발견한 음악 밖의 음악

 음악 유학, 그리고 다시 돌아온 출발점

 그는 피아노를 배우고 싶다고 아버지께 말했지만, 돌아온 건 “태권도를 해라”는 반응이었다. 

대신 허락받은 것은 전자기타 하나. 그것이 그의 첫 악기였고, 유일한 교육이었다.                                        고등학교 2학년 카세트 테이프에 녹음한 연주를 보내 미국 MI(Musician's Institute)로부터 입학 허가를 받았다. “그땐 천재인 줄 알았어요.”하지만 결국 당시 상황상 떠나지 못했다.현실은 늘 그의 음악보다 한 박자 늦었다. 

아버지는 유학을 막았고, 그는 영문학과로 진로를 돌려야 했다대학진학 후 내내 밴드를 하며 돈을 모았고, 결국 7년 뒤 LA로 날아갔다. 하지만 LA는 낭만이 아니었다. 꿈꾸던 학교는 기대와 달랐다.

 “기타에 대한 열정이 식더라고요. 잘 치는 애들은 너무 많았고, 

난 기타보다 ‘이야기’가 하고 싶었던 거였어요.”

그는 연극과 무용, 영화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깨달았다. ‘나는 기타리스트가 되고 싶은 게 아니라, ‘소리로 말하고 싶은’ 사람이었구나’그는 그때부터 레코딩, 사운드디자인, 편곡 수업을 따로 들으며 스스로를 ‘음악 만드는 사람’으로 재정의했다. 기타리스트는 많은데, 그 음악의 구조를 만드는 사람은 드물었다.        그는 편곡 수업을 듣고 레코딩 학원에 등록했다. 음향을 통제할 수 있어야 자신의 이야기를 온전히 구현할 수 있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때부터 김성수의 음악은 ‘설명’이 아닌 ‘설득’, ‘구조’가 아닌 ‘감응’의 길로 향했다.김성수의 이름은 인디 씬에서 ‘사운드를 재구성하는 사람’으로 떠올랐고, 
평론가들은 그를 100인의 명예 뮤지션 중 하나로 호명했다.
서울로, ‘독학의 경계’에서 음악을 만들다

 인디 밴드와 함께 사운드로 버틴 10년

 귀국은 IMF 직후, 그는 더 이상 미국에 머물 수 없었다.   서울에 연고 하나 없이, 신사동의 45만원짜리 월세방. “방 한 칸에는 악기를 쌓아두고 아내랑 같이 살았죠.”                                                                              재즈 아카데미에서 커리큘럼 짜고 강의하며 간신히 생계를 유지했다. 그러던 어느 날, 홍대 인디밴드 심사 요청이 왔다. “한 번 가봤죠. 그날 이후, 인디 씬에서 살게 됐어요.

”예산은 없었지만, 간섭도 없었다. “그래서 제가 해보고 싶었던 사운드 실험을 시작했어요. 외국 앨범 느낌도 만들어보고, 믹싱 테크닉 바꿔보고.” 그 실험은 ‘김성수 사운드’라 불릴 정도로 화제를 모았다. 사수 없이 그냥 독학, 버팀, 실험이 전부였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김성수의 이름은 인디 씬에서 ‘사운드를 재구성하는 사람’으로 떠올랐고, 평론가들은 그를 100인의 명예 뮤지션 중 하나로 호명했다. 

그를 언급한 평론가의 글엔 이런 말이 있었다. ‘김성수는 한국 인디씬에서 사운드 자체로 기억되는 몇 안 되는 창작자 중 한 명이다.’“ 궁극적인 목표는 음악에서 비선형성을 가지고 사람들을 설득하는 게 목적이에요

비선형 음악의 철학과 김성수 사운드

그는 자신의 음악을 규정하지 않는다. 전자음악, 오케스트라, 창극, DJ, 뮤지컬.                                             “ 궁극적인 목표는 음악에서 비선형성을 가지고 사람들을 설득하는 게 목적이에요                                   좀 어려운 얘기긴 한데 왜냐하면 선형성을 가지고 하는 거는 꼭 음악이 아니어도 되거든요.그러니까 우리는 음악을 듣다가 나도 알 수 없는 감정들이 들 때가 있잖아요                                                                     근데 그걸 단지 그냥 일반적으로는 뭐 기쁨과 희망과 슬픔과 이런 정도로 표현하는데 

사실 우리가 아는감정은 그것보다 훨씬 많잖아요. 뭔지를 모르겠는 감정들을 가지고 오는 거죠.”  

©김성수 음악감독 인터뷰 2부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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