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EOin PREMIUM=기획팀 ]
묵묵한 실력이 '유리천장'을 부쉈다…바이오 산업에 여성 리더십 DNA 이식 중
그 겨울, 김경아는 병원 인근 회의실에서 천천히 숨을 골랐다. 수십 개의 실험 튜브를 들여다보며 결과를 기다리던 연구소 시절과는 전혀 다른 종류의 긴장감이었다. 이번에는 실험이 아니라 결단이었다. 이제는 그녀가 서명하는 한 장의 문서가, 하나의 기업을 움직이는 순간이었다. 그녀는 고개를 들고 회의실 문을 열었고, 그 문 너머엔 삼성바이오에피스의 미래가 기다리고 있었다.
2023년 11월, 삼성바이오에피스는 창립 이래 처음으로 여성 전문경영인을 CEO로 임명했다. 주인공은 김경아 대표. 서울대 약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존스홉킨스대학교에서 독성학 박사를 취득한 그는, 삼성전자 종합기술원과 바이오에피스를 거치며 바이오시밀러 개발 분야에서 실력을 인정받은 인물이다. 탄탄한 연구 기반과 전략적 감각을 모두 갖춘 김 대표의 선임은 단순한 인사 이상의 메시지를 던졌다. '여성 리더의 시대'가 드디어 제약바이오 산업의 정점에서 현실화되었다는 선언이었다.
제약바이오 산업은 전통적으로 남성 중심의 문화가 강했다. 고위 경영진은 물론 이사회 구성도 예외가 아니었다. 하지만 최근 몇 년 사이 이 흐름에 균열이 생기고 있다.
2024년, SK바이오팜은 정기주주총회를 통해 이사회 의장으로 서지희 이화여대 특임교수를 선임했다. 회계와 리스크 관리 분야에서 30년 가까운 경력을 쌓은 그는 KPMG 전무 출신으로, ESG 경영과 투명성 확보에 특화된 전략가다. SK 측은 “전문성과 윤리성, 지속가능성 관점에서 탁월한 인재”라며 임명 배경을 밝혔다. 이는 상징이 아닌 전략이었다.
같은 날, 부광약품은 지평 특허법인의 대표 변리사이자 연세대 겸임교수인 안미정을 사내이사로 전격 선임했다. 그는 이미 OCI홀딩스 이사회 의장을 비롯해 제넥신, 메디포스트 등 다수 제약바이오 기업에서 활약해온 인물이다. 지식재산권과 기술이전, 해외 특허 소송 등 전략적 이슈가 복잡해지는 가운데, 경영진에 법률 및 과학기반 전문가가 포함되는 흐름이 강화되고 있다.
이러한 흐름의 중심에는 긴 시간 묵묵히 현장을 지켜온 여성 전문가들이 있다.
대표적인 인물은 JW중외제약의 함은경 사장이다. 1986년 JW그룹에 입사한 그는 개발팀장, 수액 마케팅팀장을 거쳐 계열사 대표직을 역임한 뒤 2023년 말 총괄사장 자리에 올랐다. 이듬해에는 사내이사로 선임돼 명실상부한 핵심 경영인으로 자리매김했다. 무려 40년에 달하는 현장 경험은 단순한 내부 승진 이상의 상징성을 가진다. 글로벌 수액 시장의 경쟁이 치열해지는 상황에서 그의 R&D 기반 전략은 JW의 생존과 확장에 결정적 영향을 줄 것이란 평가가 나온다.
HLB생명과학의 김연태 사장도 마찬가지다. 대웅제약, JW중외신약, 오츠카 등에서 임상개발을 이끌어온 그는, 글로벌 병용치료제 승인이라는 핵심 과제를 진두지휘하고 있다. 과거 ‘조연’이었던 임상 책임자가, 이제는 회사 전략을 좌우하는 ‘주연’이 된 셈이다.
단순한 성비 개선이 아니다. 이번 흐름은 본질적인 경쟁력 재정비라는 점에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 ESG 경영, 글로벌 전략, 투명한 이사회 운영 등 새로운 경영 패러다임에서 여성 리더 특유의 조율력, 감수성, 전략 정교함이 탁월한 효과를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삼성바이오에피스는 김경아 대표 선임 이후, 글로벌 임상 전략과 파이프라인 조정 속도에서 민첩성을 보여주고 있다. 내부 소통이 개선되고, 다양한 팀 간 협업도 이전보다 유연해졌다는 전언이다.
업계 한 관계자는 “제약사는 과거 영업 중심 조직이 강했고, 이 때문에 '군대식' 문화가 깊게 뿌리내렸다”며 “그러나 ESG 평가 항목이 주요 경영 지표로 포함되면서 문화 자체가 전환기를 맞고 있다”고 진단했다. 그는 이어 “여성 리더의 성장은 후배 여성 인재들에게 경력 비전의 확신을 주고, 이는 장기적으로 조직 경쟁력의 복리 효과로 돌아온다”고 말했다.
2023년 기준 JW중외제약의 전체 직원 1107명 중 남성은 804명으로 약 72.6%에 달한다. 하지만 주요 직책에 여성 인재가 속속 배치되며 ‘유리천장’이라는 단어는 점차 역사 속으로 사라지는 중이다. 여성 리더십의 확장은 단순한 인사 혁신이 아니라, 생명과 책임을 중심 가치로 삼는 제약바이오 산업에 가장 적합한 방향성이기도 하다.
이 흐름은 더 이상 거스를 수 없다. 왜냐하면 이들은 일시적인 유행이 아니라, 산업의 새 유전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유전자는 지금도 조용히, 그러나 단단하게 산업의 심장을 다시 코딩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