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국 편집장 [CEOin PREMIUM=편집국 편집장]
AI 시대, 데이터 주권은 기술이 아니라 사람의 신뢰에서 시작된다
기술을 넘어 문화로… 그리고 ‘만민활개(萬民活開)’라는 제언
2018년 5월 25일, 유럽은 세계 빅테크 기업들을 긴장시킨 법 하나를 시행했다. 일반개인정보보호규정, GDPR이다. 많은 기업은 이를 까다로운 개인정보 규제 정도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GDPR 제1조 1항은 그보다 훨씬 단호한 선언으로 시작한다. 개인정보의 보호는 개인의 기본적인 권리이며, 이는 유럽연합 기본권 헌장 제8조와 EU기능조약 제16조에 근거한다는 것이다. 데이터는 기업의 자산이 아니라 시민의 권리라는 선언이었다.
8년이 지난 지금, 이 질문은 더 절박해졌다. 인공지능(AI)이 모든 산업의 인프라가 된 2026년, 데이터를 가장 많이 가진 나라가 아니라 데이터를 가장 신뢰받는 방식으로 다루는 나라가 경쟁에서 앞서고 있다는 신호가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이 기획기사는 그 신호를 국내외 연구기관의 보고서와 통계, 정책 사례를 통해 추적한다.
스탠퍼드대학교 인간중심AI연구소(HAI)가 매년 발표하는 'AI Index Report'는 전 세계가 AI 경쟁력을 판단할 때 가장 많이 인용하는 보고서다. 2025년판 보고서는 AI 기업이 개인정보를 잘 보호할 것이라는 공공의 신뢰가 2023년 50%에서 2024년 47%로 하락했다고 밝혔다. 같은 기간 AI 관련 사고 건수는 233건으로 전년 대비 56.4% 늘었다. 2026년판 보고서에서는 이 수치가 362건으로 다시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흥미로운 대목은 'AI 투자'와 'AI에 대한 신뢰'가 반드시 같은 방향으로 움직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보고서는 AI 투자 규모가 가장 큰 미국의 AI에 대한 긍정적 인식 비율이 39%에 불과한 반면, 투자 규모가 작은 인도네시아는 80%에 달한다는 결과를 제시했다. 같은 조사에서 자국 정부의 AI 규제 능력에 대한 신뢰는 미국이 31%로 조사 대상국 중 가장 낮았고, 유럽연합은 미국이나 중국보다 더 신뢰받는 것으로 나타났다. 기술력과 자본력이 곧바로 신뢰로 전환되지는 않는다는 뜻이다.
같은 시기 세계경제포럼(WEF)이 발표한 '2026 글로벌 사이버보안 전망' 보고서 역시 비슷한 긴장을 보여준다. 전 세계 800명의 리더를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 응답자의 87%가 AI 관련 취약점을 가장 빠르게 커지는 사이버 위험으로 꼽았다. AI 기술이 빠르게 확산하는 만큼 그 기술을 둘러싼 불안과 통제 요구도 함께 커지고 있다는 것이다.
유럽이 GDPR에 이어 AI법(AI Act)을 세계 최초로 제정한 배경에는 '인간 중심'이라는 철학적 토대가 있다. 옥스퍼드대학교 정보철학자 루치아노 플로리디는 유럽연합 인공지능 고위전문가그룹(High-Level Expert Group on AI)에 참여해 신뢰할 수 있는 AI를 위한 윤리 가이드라인 수립에 기여했다. 이 가이드라인은 인간의 주도성과 감독, 기술적 견고성과 안전성, 프라이버시와 데이터 거버넌스, 투명성 등을 핵심 요건으로 제시한다. 플로리디는 그의 저작에서 데이터 보호 문제를 정보주체의 개인 정체성, 그리고 인간 존엄의 문제로 다뤄왔다.
이런 철학은 단순한 학술 논의에 머물지 않았다. 2026년 1월 다보스에서 열린 세계경제포럼 연차총회에서도 '디지털 주권' 논의는 핵심 의제로 다뤄졌다. 다만 흥미로운 변화가 감지된다. 세계경제포럼과 베인앤컴퍼니가 2026년 1월 공동 발표한 보고서 ‘인공지능 주권 재정의(Rethinking AI Sovereignty)’는 AI 주권을 인프라 자립의 문제로만 좁혀 보는 시각에 의문을 제기한다. 보고서는 미국과 중국이 전 세계 AI 투자의 약 65%를 차지하는 현실에서, 많은 국가에게 진정한 주권은 모든 것을 자체 구축하는 것이 아니라 신뢰할 수 있는 파트너와의 ‘전략적 상호의존’을 설계하는 데 있다고 분석한다. 싱가포르와 인도의 사례가 그 모델로 제시됐다. 데이터 주권이 고립이 아니라 신뢰 기반의 협력으로 재정의되고 있다는 신호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데이터를 국가의 새로운 생산요소로 규정하면서도, 양적 확보보다 신뢰 구조 구축을 더 강조한다. OECD가 제시하는 핵심 개념이 ‘신뢰를 동반한 데이터 자유흐름(Data Free Flow with Trust, DFFT)’이다. 국경을 넘는 데이터 이동이 경제·사회 활동에 필수적이지만, 그 흐름이 개인과 기업의 권리를 보장하는 장치 위에서 이뤄져야 지속 가능하다는 것이다.
OECD가 2025년 발표한 ‘한눈에 보는 정부(Government at a Glance) 2025’ 보고서는 회원국 정부가 보유한 고가치 데이터셋 중 평균 47%만이 개방돼 있고, 교육 분야는 37%, 보건·복지 분야는 42%에 그친다고 지적했다. 데이터를 가진 것과 신뢰 속에서 그것을 활용 가능하게 만드는 것 사이에는 여전히 큰 간극이 있다는 의미다. 보고서는 정부가 국민의 존엄과 안전을 보장하는 동시에 데이터를 전략 자산으로 다루는 이중 과제에 직면해 있다고 진단했다.
그렇다면 신뢰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이 질문에 오래전부터 답을 제시해 온 인물이 하버드대 케네디스쿨의 국제정치학자 조지프 나이다. 그는 1990년대 ‘소프트파워’ 개념을 통해 군사력과 경제력 같은 강제적 힘(하드파워)과 구별되는, 매력과 설득을 통한 영향력의 중요성을 제시했다. 나이는 정보화 시대의 권력 변화를 설명하며 “정보 시대에는 누구의 군대가 이기느냐가 아니라 누구의 이야기가 이기느냐가 중요하다”고 말한 바 있다.
올해 5월 세상을 떠난 나이가 평생 강조한 메시지는 분명하다. 문화와 가치, 정책의 매력은 단기간에 만들어지지 않으며, 한번 무너진 신뢰는 쉽게 회복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외교 전문매체 디플로(Diplo)는 그의 별세를 추모하며, 분열된 세계에서 사람들은 점점 더 문화적·언어적·정서적으로 익숙하고 친밀한 것을 신뢰하는 경향이 강해지고 있다고 평가했다. 이는 단순한 외교 이론을 넘어, 데이터 경제에도 적용될 수 있는 통찰이다. 사람은 낯선 플랫폼보다 익숙하고 호감 가는 문화와 콘텐츠를 매개로 만난 서비스에 더 쉽게 마음을 연다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대한민국이 가진 자산이 다시 주목받는다. 한국국제문화교류진흥원(KOFICE)이 발표한 ‘2025 한류의 경제적 파급효과’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해 한류로 인한 수출 효과는 약 190억 달러, 한화 약 27조 원으로 전년 대비 16% 늘었다. 같은 기간 생산유발효과는 48조 2800억 원으로 1년 전보다 21.9% 증가했다. 직전 해인 2024년 기준으로는 한류로 인한 총수출액이 151억 8300만 달러(약 20조 6000억 원), 생산유발효과는 37조 6195억 원으로 집계됐다. 품목별로는 게임 수출의 생산유발효과가 10조 2000억 원으로 가장 컸고, 관광(5조 1855억 원), 화장품(5조 719억 원), 음악(4조 2933억 원), 식료품(3조 8321억 원)이 뒤를 이었다.
한국개발연구원(KDI) 경제정보센터가 소개한 분석모형은 더 구체적인 수치를 제시한다. K콘텐츠 수출이 1억 달러 늘어날 때 소비재 수출은 1억 8000만 달러 증가하며, 이를 포함한 생산유발효과는 5억 1000만 달러, 취업유발효과는 2892명에 이른다는 추정이다. 콘텐츠 수출이 화장품과 식품, 관광 같은 연관 산업의 수출까지 끌어올리는 파급 구조를 수치로 입증한 셈이다.
이 데이터가 의미하는 바는 단순하다. K-콘텐츠는 더 이상 엔터테인먼트 산업의 부산물이 아니라, 세계인의 자발적 관심과 디지털 참여를 만들어내는 경제적 장치로 작동하고 있다는 것이다. 다만 같은 조사는 인도네시아 사례 등을 통해 반한류 정서나 문화적 이질감 같은 수용성 리스크도 함께 보여준다. 진흥원 측은 향후 한류 정책이 수용국의 사회문화적 맥락을 반영한 상호문화적 접근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제언했다. 문화적 매력이 만능 해법은 아니라는 뜻이다.
대한민국은 지금 이론이 아니라 제도로 이 질문에 답하고 있다. 2026년 1월 22일, ‘인공지능 발전과 신뢰 기반 조성 등에 관한 기본법’(AI기본법)이 시행됐다. 유럽연합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포괄적인 AI 규제 체계를 갖춘 나라가 된 것이다. 법안 명칭에 ‘신뢰 기반 조성’이라는 표현이 들어간 것 자체가 시사적이다. 정부는 산업 진흥과 위험 예방 사이의 균형을 강조하며, 시행 초기에는 과태료 부과보다 계도와 지원에 무게를 두기로 했다.
같은 시기 데이터 거버넌스 체계도 새롭게 정비되고 있다. 국가데이터처는 부처별로 흩어진 데이터 정책을 통할하기 위해 국가데이터기본법(가칭) 제정을 추진하고, 국무총리가 위원장을 맡는 국가데이터위원회 구성을 계획하고 있다. 개인정보보호법 역시 사후 제재 중심 체계에서, AI와 데이터 활용을 뒷받침하는 사전예방형 신뢰 인프라로 전환하는 방향으로 개정되고 있다. 정보통신정책연구원(KISDI)이 올해 4월 내놓은 ‘마이데이터 활성화를 위한 행동경제학적 접근 및 정책 방향’ 연구는 국민이 자신의 데이터를 더 적극적으로 이해하고 활용 여부를 결정하도록 돕는 제도 설계가 필요하다고 제언한다. 데이터를 누가 갖느냐의 문제에서, 개인이 자신의 데이터를 신뢰 속에서 통제할 수 있느냐의 문제로 정책의 무게중심이 옮겨가고 있는 것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사례와 연구는 하나의 방향을 가리킨다. 데이터 경제의 다음 단계는 더 많은 데이터를 모으는 경쟁이 아니라, 더 많은 사람의 신뢰를 얻는 경쟁이라는 것이다. 유럽은 그 신뢰를 법적 권리로 제도화했고, OECD는 국경을 넘는 신뢰의 흐름을 설계하고 있으며, 세계경제포럼은 주권을 고립이 아닌 상호의존으로 재정의하고 있다. 그리고 그 신뢰를 사람의 마음 깊은 곳에서 끌어내는 가장 오래된 도구는, 조지프 나이가 평생 연구한 문화와 콘텐츠였다.
이런 흐름 속에서 하나의 개념을 제안해볼 수 있다. 모든 국민이 데이터의 단순한 제공자가 아니라, 자신의 데이터를 이해하고 그 활용에 참여하며 가치 창출의 주체가 되는 디지털 공동체. 이를 ‘만민활개(萬民活開)’ — 모든 국민이 함께 살아 움직이며 함께 열어가는 데이터 생태계 — 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아직 학계나 정책 문헌에 등장하는 공인된 개념이 아니라, 위의 사례들을 종합한 이 기획기사의 제언이다. AI기본법과 마이데이터 정책, 국가데이터 거버넌스 개편이라는 한국의 제도적 실험이 본격화되는 지금이, 이 제언을 구체적인 정책 의제로 발전시켜볼 시점이라고 할 수 있다.
반도체는 AI의 두뇌를, 클라우드는 AI의 공간을 만든다. 그러나 데이터는 결국 사람에게서 나온다. 스탠퍼드의 통계는 신뢰 없는 기술 투자가 곧바로 신뢰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고, OECD와 세계경제포럼은 신뢰 없는 데이터 흐름은 지속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리고 K-콘텐츠의 경제 효과는 문화적 호감이 실제로 소비와 산업으로 전환된다는 것을 수치로 증명하고 있다.
대한민국은 기술강국과 문화강국이라는 두 가지 자산을 동시에 가진 드문 나라다. AI기본법 시행과 데이터 거버넌스 개편이라는 제도적 전환점에 선 지금, 남은 과제는 이 두 자산을 데이터 전략으로 연결하는 정책적 상상력이다. 데이터 주권의 시대는 결국 사람의 신뢰를 얻는 시대이며, 그 신뢰를 만드는 가장 오래되고 가장 강력한 도구는 여전히 문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