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국 편집장 2025년 11월, 서울 강남구 테헤란로의 한 스타트업 사무실. 이재훈 대표(41세, 가명)는 직원 23명을 앞에 두고 회사 폐업을 선언해야 했다. "미안합니다. 더 이상 급여를 지급할 수 없습니다." 3년간 쏟아부은 개발비 17억 원, 벤처캐피탈에서 유치한 투자금 12억 원이 모두 증발했다. 그의 신용점수는 850점에서 580점으로 급락했고, 아파트 담보대출 연체로 경매 통지서가 날아왔다.
"실리콘밸리에서는 '3번 망해봐야 제대로 된 사업가'라고 하더군요. 저도 그런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한국에서 한 번 실패하면 끝입니다. 신용불량자가 되어 휴대폰 개통도 안 되고, 아이 학원비 카드 결제도 거부당합니다. 재기? 그런 건 이 나라에 없습니다."
이재훈 대표의 이야기는 특별한 것이 아니다. 이것이 대한민국에서 실패한 수많은 이들이 마주하는 냉혹한 현실이다.
한국개발연구원(KDI)의 2024년 보고서는 충격적인 수치를 제시한다. 창업 후 3년 내 폐업률은 62.3%에 달하지만, 이 중 재창업에 성공하는 비율은 단 8.7%에 불과하다. 미국(28.4%), 독일(19.2%)과 비교하면 3분의 1 수준이다.
더 심각한 것은 사회적 낙인이다. 취업포털 사람인이 기업 인사담당자 5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에서, 73.2%가 "이력서 공백 기간에 대해 부정적으로 평가한다"고 답했다. 특히 "사업 실패 경험이 있는 지원자를 채용하겠다"는 응답은 12.8%에 그쳤다. 반면 같은 질문에 미국 기업 인사담당자의 64.3%는 "오히려 긍정적"이라고 답했다.
금융권의 장벽은 더욱 높다. 신용회복위원회 통계에 따르면, 사업 실패로 신용등급이 하락한 채무자가 원래 신용등급을 회복하는 데 걸리는 평균 기간은 7.4년이다. 이 기간 동안 이들은 사실상 금융시장에서 퇴출된다. 이재훈 대표는 "2금융권에서조차 대출을 거부당했다. 카드론 금리가 연 23.9%였다. 사채를 쓰라는 건가"라며 분노를 감추지 못했다.
서울의 한 경영학과 교수는 단호하게 말한다. "한국은 실패자를 범죄자 취급한다. 이건 제도적 폭력이다. 정직한 실패와 사기·횡령을 구분하지 못하는 시스템이 문제의 핵심이다."
그가 제시하는 제도 개혁 방안은 구체적이다.
첫째, 신용회복 기간을 대폭 단축하라.
현행 개인파산 면책 결정까지 평균 18개월이 소요되고, 이후에도 5~7년간 금융 불이익이 지속된다. 김 교수는 "네덜란드처럼 정직한 실패의 경우 1년 내 신용 회복이 가능하도록 파산법을 전면 개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실제로 네덜란드는 2022년 파산법 개정으로 개인파산 면책 기간을 3년에서 1년으로 단축했고, 재창업률이 23% 증가했다.
둘째, '재기지원펀드'를 대규모로 조성하라. 현재 중소벤처기업부의 재도전 성공패키지 예산은 연 340억 원 수준이다. 연간 폐업 기업이 80만 개에 달하는 상황에서 턱없이 부족하다.K대 경영학과 교수는 "최소 3조 원 규모의 국가 재기지원펀드가 필요하다. 이는 비용이 아니라 투자다. 실패 경험을 가진 재창업자의 성공률이 초기 창업자보다 30% 높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고 강조한다.
셋째, 실패자 고용에 세제 혜택을 부여하라. 프랑스는 2019년부터 창업 실패자를 채용한 기업에 대해 3년간 법인세 15%를 감면해주고 있다. 그 결과 실패한 창업가의 재취업률이 34%에서 58%로 상승했다. 한국조세재정연구원의 시뮬레이션에 따르면, 유사한 제도를 도입할 경우 연간 약 4만 8천 개의 일자리 창출 효과가 예상된다.
넷째, 학교부터 실패 교육을 시작하라. 현재 한국의 초중고 교육과정에 '실패로부터 배우기'는 단 0.3%만 다뤄진다. 모 연구소교육학 전문가는 "핀란드는 전체 수업의 18%를 프로젝트 기반 학습으로 운영하며, 실패한 프로젝트도 A학점을 받을 수 있다. 중요한 건 결과가 아니라 과정에서의 학습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실리콘밸리의 벤처캐피탈리스트 마크 앤드리슨은 이렇게 말했다. "나는 한 번도 실패해보지 않은 창업가에게는 투자하지 않는다. 실패는 가장 훌륭한 교사다." 실제로 세쿼이아캐피탈의 2023년 포트폴리오 분석 결과, 그들이 투자한 성공 기업 CEO의 78%는 이전에 최소 한 번의 창업 실패 경험이 있었다.
독일 뮌헨공과대학의 장기 추적 연구(2008~2023)는 더 구체적인 데이터를 제시한다. 재창업자의 5년 생존율은 67%로, 초기 창업자(42%)보다 25%포인트 높았다. 재창업 기업의 평균 매출액도 34% 더 높았다. 연구를 주도한 볼프강 슈미트 교수는 "실패 경험은 리스크 관리 능력을 극적으로 향상시킨다.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재창업자가 훨씬 유리하다"고 분석했다.
스웨덴 스톡홀름에서는 매년 'Fuck Up Night'(실패의 밤)이 열린다. 2024년 11월 행사에는 3,200명이 몰렸다. 무대에 오른 에리카 스벤손(38세)은 자신의 패션 스타트업이 어떻게 2년 만에 파산했는지 낱낱이 공개했다. "공급업체 선정 실수로 3억 크로나(약 360억 원)를 날렸습니다. 정말 멍청한 판단이었죠." 청중은 웃고 박수쳤다. 그리고 행사 후 5개 벤처캐피탈이 그녀에게 투자 제안을 했다. 현재 그녀의 두 번째 회사는 북유럽 시장점유율 1위를 달리고 있다.
변화의 씨앗은 뿌려지고 있다. 2023년 서울시가 개최한 '실패박람회'에는 2만 3천 명이 다녀갔다. 행사를 기획한 서울산업진흥원 김태형 본부장은 "처음엔 500명 정도 올 거라 예상했는데, 청년들의 반응이 폭발적이었다"고 전했다.
카카오는 2024년부터 '실패 이력 우대 채용'을 시행 중이다. 창업 실패, 프로젝트 실패 경험을 이력서에 기재하면 서류전형에서 가산점을 받는다. 인사팀장은"6개월간 127명을 이 제도로 채용했는데, 이들의 평균 업무 평가 점수가 일반 채용자보다 12% 높았다. 실패를 극복한 경험이 문제해결 능력으로 이어진다"고 말했다.
성균관대는 2023년부터 '실패학 학점제'를 도입했다. 학생들이 도전적 프로젝트에서 실패해도 F가 아닌 'CF(Creative Failure)' 등급을 부여하고, 이는 졸업학점으로 인정된다. 1년간 284명이 CF 학점을 받았고, 이 중 73%가 다시 도전해 프로젝트를 완성했다. 담당 교수는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으니 학생들이 훨씬 창의적인 시도를 한다. 이게 진짜 교육"이라고 평가했다.
제임스 다이슨은 5,126번의 시제품 실패 끝에 세계적인 청소기를 만들었다. 그가 한국에서 태어났다면? 아마 100번째 실패 즈음 신용불량자가 되어 지하 단칸방에서 대부업체 독촉 전화를 받고 있을지 모른다.
토마스 에디슨은 말했다. "나는 실패한 것이 아니다. 그저 작동하지 않는 1만 가지 방법을 발견했을 뿐이다." 하지만 한국 사회는 그 1만 번의 시도조차 허락하지 않는다. 첫 실패에서 멈추라고, 더 이상 시도하지 말라고 경고한다.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2023년 한국의 청년 창업률은 3.2%로, OECD 평균(8.7%)의 절반에도 못 미친다. 서울대 창업 동아리 소속 대학생 김수진(가명) 씨는 솔직하게 말한다. "창업하고 싶지만 무섭습니다. 실패하면 인생 끝이잖아요. 차라리 대기업 들어가는 게 안전하죠. 꿈을 포기하는 게 아니라, 생존을 선택하는 겁니다."
한국은 지금 기로에 서 있다. 저출산율 0.72명, 사상 최저 경제성장률 2.1%, 청년실업률 8.4%. 이 위기를 돌파할 혁신은 어디서 나올까?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도전에서 나온다. 한국경제연구원의 2024년 보고서는 "만약 한국의 재창업률이 미국 수준(28%)으로 상승하면, 연간 68조 원의 경제적 가치 창출과 42만 개의 일자리가 생긴다"고 추산한다.
이제 선택해야 한다. 실패를 낙인찍어 인재를 소진시킬 것인가, 실패를 디딤돌 삼아 더 높이 도약할 것인가. 제도를 바꾸고, 문화를 바꾸고, 인식을 바꿔야 한다. 지금 당장, 미룰 수 없다.
실패가 허용되는 사회. 그것은 약자를 위한 동정이 아니다. 대한민국의 생존 전략이다.